7화. 기억의 틈에 서다
『지금도, 넌 날 두려워하니?』
그림자의 목소리는 바람이 스치는 듯 낮고 묘하게 울렸다. 도윤은 마치 오랜 시간 내면 깊숙한 곳에 봉인해 두었던 무언가가 눈앞에서 되살아난 듯한 얼굴로, 가만히 그 형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진짜 아버지가 아니야.”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확신 없이 떨렸다. 그림자는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단지 조용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벽 너머에서 다가오는 어둠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이연 씨, 뒤로!”
도윤이 소리쳤고, 이연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림자는 이연이 아니라 오직 도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너를 무섭게 한 적이 없단다, 도윤아. 단지… 널 강하게 키우고 싶었을 뿐이야.”
“거짓말 하지 마!”
도윤의 외침이 공간을 울렸다. 그 목소리엔 분노보단… 죄책감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이연은 그것을 느꼈다. 이 그림자가 왜 나타났는지를.
“이건, 네 기억 속의 아버지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기억하고 싶지 않아 묻어버린… 그 감정이 만든 그림자야.”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연의 말은 곧 그가 두려워하는 진실이었다. 그의 손끝이 조금씩 떨렸다.
“내가 만든 거라고?”
“그래. 그림자는 잊힌 기억에서 태어나. 그리고 그 감정이 강할수록, 더 강하게 실체화되는 거야. 진아처럼… 네 아버지도… 너한테서 나온 존재야.”
그림자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이연의 말을 듣고 있다는 듯.
『그럼… 내가 널 만든 거니, 도윤아? 아니면… 네가 나를 만든 거니?』
그 질문은 이상하리만치 날카롭고, 정곡을 찔렀다. 도윤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연은 그를 감싸듯 곁에 다가앉았다.
“도윤 씨. 당신이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 그림자의 형태를 결정해. 이 존재는 네 안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아버지야. 미워하면서도 용서받길 바랐던 마음. 그게… 지금 이 그림자의 실체인 거야.”
“그럼… 난 계속 이런 그림자들을 만들어내는 건가요?”
도윤의 물음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이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그래. 내가 진아를 잊어버렸던 것처럼… 당신도 아버지를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 했잖아. 그래서, 그가 돌아온 거야. 우리에게.”
그림자는 그제야 천천히 물러섰다. 어깨가 축 처졌고, 더 이상 위협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글픔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넌 날 기억했구나.』
그 말과 함께 그림자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마치 안개가 걷히듯, 조용히 흩어졌다.
그 순간, 공간이 달라졌다. 마치 누군가의 꿈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전등이 다시 켜졌고, 바깥의 소음이 돌아왔다.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도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난 이제 알겠어요. 이건 귀신도, 망령도 아니에요. 이건 우리 안에 남은 감정의 잔해예요.”
이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빛이 마주쳤다.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그럼 다음은… 진아 차례네요.”
이연의 말에 도윤은 고개를 돌렸다.
“진아는 단순히 당신에게 분노해서 그림자가 된 게 아닐 거예요. 그녀가 원하는 건… 복수가 아니라 기억일 수도 있어요. 당신이 그녀를 완전히 잊어버렸기 때문에… 돌아온 거죠.”
“… 내가 기억하면, 진아는 사라질까요?”
“아니요.” 이연이 말했다. “기억하는 건, 그 존재를 인정해 주는 거예요. 진아는 당신에게 ‘존재했던 사람’으로 남고 싶은 거예요.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림자는 달라져요.”
조용히 흐르던 시간.
이연은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어두운 거리 끝, 어디선가… 누군가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리프행어]
그림자는 단순한 망령이 아닌, ‘잊히기를 거부한 기억’이라는 진실이 드러났다. 이제 진아를 마주해야 할 시간. 이연은 진아에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그림자의 감정은 기억만으로 풀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