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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연가》 시즌1 8화. 금기의 장소

writerwilshere 2025. 5. 17. 10:00

8화. 금기의 장소

서울 북쪽 끝, 무허가 주거지였던 오래된 달동네. 현재는 철거가 완료된 상태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그곳이 남아 있었다. 진아의 마지막 기록이 남아 있던 장소. 바로 이곳이, 그녀의 그림자가 강하게 반응하는 지점이었다.

이연은 어릴 적 이 동네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단 한 번—— 모진 비가 내리던 날, 어머니와 함께 이 언덕 위 작은 집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던 장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문 앞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데리고 내려왔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 집엔 아무도 없어. 다시는 가지 말자.”

이연은 어릴 적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진아는 그 집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연과 친구였던 시절조차 존재하지 않는 듯한 사람이었다.

“이 안에 들어가면… 뭐가 있을까요?” 이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도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기억이 있을 겁니다. 아주 오래된, 잊힌 기억이.”

철문은 녹이 슬고 문짝은 반쯤 떨어져 있었다. 이연이 먼저 발을 들였다. 안은 어둡고 적막했다. 하지만 묘하게, 공기에는 익숙한 냄새가 맴돌았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 속에 섞여 있는 미세한 꽃비누 향.

“이 냄새…”

“진아가 자주 쓰던 비누였어요.” 도윤이 조용히 말했다. “지금도 기억나요. 그 애가 손을 씻고 나면 항상 이 냄새가 났죠.”

이연은 방 한쪽에 놓인 작은 책상을 발견했다. 낡고 오래된 수첩 하나가 그 위에 놓여 있었다. 먼지를 털고 조심스레 펼치자,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이연이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그림 자니까, 그게 맞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그녀도 날 기억할까?』

이연의 손끝이 떨렸다. 수첩 곳곳에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 그 시절 자신은 진아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진실은—— 그녀가 진아를 ‘무시’했던 것이었다. 조용하고, 존재감 없고, 말도 없던 진아는 자연스레 주변 아이들에게 잊혔고, 이연조차도 그녀의 존재를 ‘외면’했다.

“……내가… 널 버렸구나.”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변했다.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창밖의 빛마저 사라진 듯 어두워졌다. 그리고——

『기억해 줬구나.』

그 목소리는 방 안 가득히 퍼졌다. 이연은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 초등학생 시절의 모습. 그 얼굴은 사진 속 진아였다.

“진아야… 나… 미안해.”

이연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진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왜 이제야 불러줬어… 나 여기, 항상 있었는데…』

“너를 잊은 게 아니야. 그냥… 내 안에서 묻어버렸던 거야. 너를 바라보는 게, 그 시절 내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무서웠어.”

진아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연은 눈을 감았다. 차가운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그리고—— 따뜻했다.

『기억해 줘서… 고마워.』

진아의 몸이 점차 흐릿해졌다. 형체가 부서지듯 흩어져갔다. 마치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조용히, 고요히. 이연은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다시는 널 잊지 않을게.”

방 안의 공기가 다시 따뜻해졌다. 바깥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가 들려왔고, 빛이 서서히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도윤이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보내줬군요.”

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흐른 눈물을 닦지 않은 채로.

“하지만… 진아 말고도 아직 있어요. 아직도 누군가… 날 보고 있어요.”


[클리프행어]
진아의 그림자는 이연의 기억 속 존재로 돌아가며 사라졌지만, 이연은 여전히 ‘다른 시선’을 느끼고 있다. 그녀를 바라보는 또 다른 그림자—— 그 실체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