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연가 : 잊힌 자들의 연가》
시즌2 - 3화. 그림자의 노래
서울. 새벽 4시. 도시의 빛이 꺼지지 않는 시간.
이연과 도윤은 마지막 그림자를 쫓아 옛 병원 건물로 향했다. 폐쇄된 지 20년이 넘은 건물. 철문엔 ‘출입금지’ 표지가 걸려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림자들은 그 경계를 넘었다.
“왜 하필 여기에 마지막 그림자가 있는 걸까요?” 도윤이 물었다.
이연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림자들은 사람의 기억에 머물러 있어요. 이 병원은… 존재했던 수많은 생과 사가 뒤섞인 공간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가장 많이 ‘잊힌 사람들’이 모였던 곳.”
문을 열자,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소독약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바람이 스치듯 들이쳤다. 그 속에서,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들려요?”
이연은 몸을 굳혔다. 낯선 멜로디. 익숙한 정서. 어디선가—— 아주 오래전부터 들었던 노래. 그녀는 조용히 따라 불렀다.
“……너는 나를 기억하지 않아도, 나는 너의 그림자로 남았지…”
도윤은 숨을 멈췄다. “그 노래… 어떻게 알죠?”
“어릴 때, 늘 꿈에서 들었어요. 난 그게 내 상상이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지금…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들은 병원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오래된 정신과 병동. 문이 반쯤 열려 있는 치료실 안, 한 인물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하얀 병원복을 입은 채, 조용히 건반을 두드리는 존재——
그것은 얼굴이 없었다.
그저 하얗게 번진 형체. 얼굴 없는 존재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저건…… 누구죠?”
도윤이 경계했다. 이연은 다가가며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 그림자예요. 모든 그림자들이 흘러온 마지막 종착지.”
그림자는 노래를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이 없는 얼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름 없는 기억. 누구도 기억하지 않은 존재.』
“당신은… 한 사람의 그림자가 아니에요?”
『나는 수많은 잊힌 이들의 감정이 모여 만들어진 집합. 존재하지 않은 존재. 버려진 말, 지워진 얼굴, 묻힌 이름들의 노래.』
이연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 그림자는 ‘모두의 그림자’였다. 특정한 누구의 감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기록되지 않은 채 사라진 사람들’의 조합. 그것은 이 사회가 외면해 온 존재들, 누구의 기억 속에도 완전히 남지 못한 이들의 잔재였다.
“그래서 노래했군요.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라도… 당신들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림자는 조용히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형태가 뚜렷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얼굴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어린아이, 노인, 여성, 군인, 간호사, 노숙자, 이민자, 미혼모——
『우리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단지, 누군가의 삶에 잠깐 스쳐갔던 그림자였을 뿐.』
“당신들의 이름을 남길게요. 당신들의 노래, 우리가 끝까지 기억할게요.”
이연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는 작은 녹음기를 꺼내어, 노래를 틀었다.
진아의 그림자가 마지막에 남겼던 노래.
‘나는 네가 기억하지 않아도, 너의 발밑을 따라 걷는 노래가 되었지…’
그 순간, 그림자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입도 없고, 눈도 없고, 형태도 분명하지 않은 존재였지만, 울음은 분명히 들렸다.
『그래도… 우리는, 존재했었다.』
빛이 들어왔다. 병원 천장의 오래된 채광창 사이로 쏟아진 햇살이 그림자를 관통했다.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인정’을 갈망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이연과 도윤은 손을 맞잡았다. 병원 안을 채웠던 잊힌 감정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림자의 노래는 끝났지만, 그 여운은 길고 조용히 남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 서울의 새벽은 마침내 아침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 진짜 끝이네요.”
이연이 말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우린, 그림자들이 남긴 이야기를 기억할 사람들이 된 거야.”
“그리고 앞으로 잊지 않기로 약속해야 해요. 누군가의 그림자조차, 삶의 일부였다는 걸.”
그들의 발걸음이 거리 위로 이어졌다. 그 길 위엔, 이제 더 이상 그림자가 따라붙지 않았다.
아무도 잊히지 않는 세계.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한 줄의 기억, 다른 누군가에겐 노래로 남아 있었다.
[완결]
《그림자 연가》는 여기서 마무리됩니다.
이연과 도윤은 각각 자신과 타인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며, 잊힌 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자’로 거듭났습니다.
그림자의 노래는 끝났지만, 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당신 안에서, 또 다른 연가가 시작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