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연가 : 잊힌 자들의 연가》
시즌2 - 1화. 그림자도 울 때가 있다
새벽이 밝았다. 그림자가 걷히고, 기억의 조각들이 이연의 마음속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진아를 보내고 난 후, 그녀는 더 이상 그림자에 휘둘리지 않았다. 이제는 스스로 그림자를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 감정을 말로 꺼낼 수 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연 씨, 여기… 하나 더 있어요.”
도윤이 보여준 것은 새로운 CCTV 영상이었다. 강북구의 한 오래된 지하철 역사. 밤 2시 48분, 아무도 없어야 할 승강장에 누군가가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물의 움직임은 이상했다.
프레임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 마치 같은 자리에 있는 듯하면서도, 시간의 흐름과 어긋나는 형체.
이연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저건…… 나야.”
“네?”
“영상에 나오는 사람… 나를 닮았어요. 하지만 분명 내가 아니에요.”
도윤은 즉시 데이터를 확대해 분석에 들어갔다. 얼굴 인식 프로그램은 혼란스러운 결과를 뱉어냈다. 80% 이상 일치하는 백이연, 하지만 나머지는 ‘미확인’.
“이건… 네 그림자가 자율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이에요. 너와 분리된 채로.”
이연은 소름이 돋았다. 그림자가, 자신과 무관하게 현실을 돌아다닌다? 그것은 감정의 파편이 아니라, 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말이었다.
그날 밤, 이연은 그 지하철 역을 찾았다. 도윤과 함께 역사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숨이 막힐 듯 좁고 어두웠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곳, 폐쇄된 승강장 끝. 그리고——
“……여기야.”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분명히 느껴졌다. 차가운 기운, 익숙한 눈빛.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형체는 흐릿했지만, 윤곽은 명확했다. 검은 옷, 이연과 똑같은 얼굴. 하지만 눈동자는 공허했다. 감정 없는 유리구슬 같았다.
“넌 왜 여기에 있어?”
이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림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곁을 천천히 맴돌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는 아직, 나를 다 기억하지 못했어.』
처음으로 그림자가 말을 꺼냈다. 목소리는 낮고 쓸쓸했다. 이연은 숨을 삼켰다. 진아, 도윤의 아버지… 그들은 특정한 기억의 조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존재는, ‘전체’였다.
“그럼… 너는, 나의 전부를 기억하는 존재인 거야?”
『나는 네가 외면한 모든 순간의 합이야. 너조차 기억하기를 거부했던 가장 밑바닥의 너.』
“그렇다면… 넌 왜 나타난 거야? 나를 대신하려는 거라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
그림자는 이연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난 네가 나를 받아들이길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진짜로 나를 안아주기를.』
“그럼 이제 사라질 수 있어?”
그림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사라지지 않아. 다만—— 이제 너와 함께 살아갈 거야.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너의 일부로.』
순간, 승강장 전체가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다른 그림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과거의 감정들. 죄책감, 공포, 부끄러움, 외로움—— 그 모든 잔재들이 실체 없는 형체로 변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도윤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막아섰다.
“이연 씨, 도망쳐요!”
“아니. 도망치지 않을 거야.”
이연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림자에게 손을 뻗었다.
“같이 가자.”
그림자는 처음으로, 진짜 감정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야 넌 진짜 너야.』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고, 승강장에 빛이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던 그곳엔—— 단 하나의 실체만이 남았다.
이연, 그리고 그녀 자신.
[클리프행어]
이연은 자신과 분리된 그림자를 마주하고, 진정한 ‘자기 통합’의 길로 나아간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그림자—— 도윤의 ‘또 다른 기억’이 고개를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