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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연가 : 잊힌 자들의 연가》 시즌2 - 2화. 나는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

writerwilshere 2025. 5. 17. 22:00

《그림자 연가 : 잊힌 자들의 연가》

시즌2 - 2화. 나는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

“모든 그림자가 사라진 게 아니야.”

이연은 지하철 승강장 위,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림자였던 ‘자신’과 화해한 이후,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감정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아직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윤 씨.”

“…응?”

“혹시, 당신도 무언가—— 아니, 누군가 기억하고 있지 않나요? 하지만 동시에, 잊고 싶은 이름.”

그 순간, 도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이연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긴 침묵 끝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어릴 적 함께 지내던 형이 하나 있었어요. 피를 나눈 형은 아니었지만, 보호시설에서 가족처럼 지냈죠. 이름은—— 유건.”

그는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유건 형은 나보다 다섯 살 많았어요. 항상 나를 보호해 줬고, 경찰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것도 그 형이 먼저였어요. 근데 어느 날… 형이 사라졌어요. 누군가 데리고 나갔는데, 그 이후로 다시 못 봤어요.”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요?”

“했어요. 하지만 시설 아이들의 말은 대개 ‘도망쳤다’, ‘문제아였다’는 식으로 무시됐죠. 나도 결국 믿게 됐어요. 형은 나를 버렸다고. 그렇게 기억에서 밀어냈어요.”

그의 말이 끝날 무렵, 지하철 승강장의 조명이 갑자기 깜빡였다. 그 순간——

『넌 나를 버렸어.』

공간이 울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플랫폼 끝, 암흑 속에서 한 남자의 형체가 나타났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검은 후드를 쓰고 있었다. 형체는 천천히 다가오며 도윤을 바라보았다.

“……유건… 형?”

도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형체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미소를 지었다.

『넌 나를 기억해. 그런데 왜… 왜 그토록 나를 지우려 했니?』

“난…… 형이 죽었다고 생각했어. 아니, 그렇게 믿으려고 했어.”

『그게 나를 죽인 거야.』

이연은 도윤 앞에 나섰다. 그 형체는 분명 ‘유건’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기억이 만들어낸 그림자였다. 그리고 지금 도윤은 과거의 죄책감과 두려움 앞에서 얼어붙고 있었다.

“형은 지금 당신을 탓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는 여전히 당신 안에 있어요. 당신이 그를 지워버린 그 순간부터, 그는 그림자가 되어 당신을 기다려왔던 거예요.”

도윤은 주먹을 쥐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유건 형의 목소리가, 손끝이, 웃음이 전부 떠올랐다. 자신이 형을 얼마나 따랐고 의지했는지를, 그리고 그 상실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형… 미안해. 나, 형을 버린 게 아니야. 그냥…… 형이 사라지고 난 뒤에, 너무 무서워서… 형의 흔적을 붙잡고 있으면 내가 무너질까 봐… 그게 무서웠어.”

그림자는 조용히 다가와 도윤의 앞에 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말이 없었다. 그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연이 조용히 말했다.

“잡아요. 지금 이 순간, 형은 당신에게 원망이 아니라 ‘기억’을 바라고 있어요. 존재했었다는 걸, 당신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는 걸 확인받고 싶은 거예요.”

도윤은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림자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그림자가 무너지듯 흩어졌다. 하지만 그 소멸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한, 안식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림자의 입에서 마지막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너는, 나를 기억했구나.』

공간이 조용해졌다. 어둠은 물러가고, 승강장은 다시 빛으로 가득 찼다. 도윤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켰다.

“……고마워요.”

“괜찮아요.”

이연은 그의 옆에 앉았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그림자를 마주했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그림자들은 단지 사람들의 ‘감정’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잊힌 존재’들이 만들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는 것을.

“우리, 끝났을까요?”

도윤의 물음에 이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에요. 그림자들이 전하려던 진짜 노래. 그걸 듣는 순간, 진짜 끝이 와요.”


[클리프행어]
이연과 도윤은 각각 자신의 그림자들과 화해했다. 하지만 마지막 한 조각—— 그림자들이 모두 바라보는 최종의 ‘목소리’가 남아 있다.